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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1_b01a.jpg  한자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중국 고대 제왕시대(帝王時代)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이었던 창힐(倉[吉+頁])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한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중심이지만, 이는 중국의 여러 성인창조전설(聖人創造傳說)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외에 고대 삼황(三皇)의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와 서계(書契)를 만들어 정치에 사용했다는 전설에서, 이 팔괘와 서계를 한자의 기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역시 복희씨가 용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는 신화 속의 인물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결국 한자의 역사를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보는 객관적 학설은 고고학(考古學)에서 발굴로 확인된 갑골문(甲骨文)의 유물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자 서체의 변천은 회화적 요소가 중심이었던 갑골문에서부터 역사적인 시대 변천에 따라 많은 변화를 이루게 되는데, 큰 변화를 살펴보면 초기의 갑골문과 금문(金文)에서 전서(篆書)로 변화된 시점과 전서에서 예서(隸書)로의 변화, 또 예서에서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와 같은 현재 사용되는 서체로 변화된 시점을 큰 줄기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고대 한자 서체가 회화적 요소라는 기본 특징을 지니던 것이 점차 회화적 요소가 줄어들면서 문자로써의 기능이 강조된 기호적 요소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갑골문이 한자의 원시형태라는 학설을 바탕으로 갑골문부터 시대의 변천에 따른 한자의 서체의 변화를 중심으로 각 서체의 특징과 시대 상황을 다루면서, 한자의 서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한자의 발전과정을 통한 한자의 자원(字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계기를 삼고자 합니다.

 

 
 

  현재 한자의 원형으로 정의 내리고 있는 갑골문(甲骨文)은 '甲'과 '骨'에 회화적 요소를 지닌 표시를 기록한 것이 유적에서 발굴됨으로 인해 문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은(殷)나라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갑골문은 한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만든 결정적인 역할과 함께 한자의 자원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하는 계기가 된 문자학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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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骨의 '甲(갑)'은 거북의 배 껍질의 의미이고, '骨(골)'은 소 같은 짐승의 어깨 뼈나 넓적다리 뼈 같은 것입니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1,000년 무렵까지 있었던 중국 고대 은(殷)나라[商(상)이라고도 함]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었는데, 전쟁 등의 국가 중대사부터 모든 행위와 현상을 제사장이 천신(天神)이나 자연신(自然神), 혹은 조상신(祖上神)에게 이 갑골을 이용해 점을 쳤습니다.

  점을 치는 방법은 주로 갑골에 구멍 같은 흠집을 내고 그것을 불에 올려놓고, 열로 인해 그 흠집으로부터 갈라진 방향에 따라 길흉(吉凶)의 판단했습니다. 주로 점을 친 후에 그 결과를 갑골에 기록을 해 놓았기 때문에 갑골문은 "복사(卜辭)"라고도 불리고, 칼로 새겨놓았기 때문에 '계문(契文)'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1899년 홍수 때 처음 발견된 갑골문은 그 지역[현재 하남성(河南城) 안양현(安陽縣) 소둔(小屯)]이 은(殷)나라의 도읍지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옛터'라는 의미로 '은허(殷墟)'라고 불리고 그 문자를 '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합니다..

  갑골은 그 자체가 아주 딱딱하기 때문에 그 표면에 글자를 새기기 위해서 청동(靑銅) 같은 금속이나 경옥(硬玉) 같은 단단한 칼날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갑골문은 서체가 가늘고 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수의 갑골문은 먹이나 붉은 먹을 이용해 붓으로 쓰여진 것들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은 원시 문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화적 요소가 강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물의 모양을 그대로 묘사해 문자화했기 때문에 상형문자(象形文字)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주로 단독적인 독체자(獨體字)[文]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 대략 4,000여 자 정도를 확인했는데, 아직 상당수의 글자는 해독을 못하고 있고, 특이한 점은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일한 글자도 그 모양의 차이가 상당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갑골문은 현재에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학(文字學)뿐만 아니라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소중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갑골문의 서체를 처음 접하면 현재의 한자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 진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한자 이해의 측면에서 갑골문으로부터 서체의 변화를 접하면서 보다 분명한 한자의 자원(字源)을 확인하는 것이 한자를 바르게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입니다.

 

 
 

  갑골문(甲骨文)과 함께 한자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서체인 금문(金文)은 갑골문보다 폭넓은 지역과 많은 유물로 인해 문자학의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된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서체(書體)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금속에 주조된 특징으로 인해 금석학(金石學)의 시원과 함께 원시 한자 서체의 또 다른 한 축을 나타내게 되고, 고대 주(周)나라의 다양한 문화까지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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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금)'은 고대부터 금속의 대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글자이기 때문에 금문의 '金'은 중국 고대 청동(靑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 틀[거푸집]에 새겨 넣은 글자들인데, 이로 인해 금문의 다른 명칭으로 청동기의 대표적인 유물인 악기류(樂器類)의 쇠북[鐘]이나 예기류(禮器類)의 솥[鼎]의 이름에서 유래해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합니다.
  시기적으로는 중국 고대 주(周)나라 시절의 유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지만, 그 이전 왕조인 은(殷)나라에서 사용된 금문이 발견되기도 하였고, 후대 철기(鐵器) 시대인 한(漢)나라 때까지 금문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사용 시기로 인해 다양한 서체의 특징을 보이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갑골문보다 더 원형에 가까운 자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아울러 금문이 새겨진 기물(器物)에는 한 글자만 주조된 것부터 몇 백 글자가 주조된 기물까지 발견되었는데, 새겨진 내용으로는 주조된 청동 기물의 축복을 기원하는 내용을 표시하거나 주조된 연원이나 기물의 주인 등을 표시했고, 또한 전반적인 당시의 상황인 전쟁이나 제례(祭禮), 계약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나 사회, 문화 등을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금문은 청동기를 주조할 때 주물의 틀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기에, 주조되어 완성된 기물(器物)에 명확하게 글자가 보여지기 위해서는 새기는 글자의 크기가 크고 굵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늘고 긴 서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갑골문과 비교하면 금문은 넓고 굵은 서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이유로 인해 동일한 글자가 여러 모양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체자(異體字)가 많은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갑골문에 비해 금문은 회화적 요소로부터 점차 문자로서의 특징을 지닌 기호적 요소가 많이 나타나 점차 문자의 틀이 발전되어 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주로 두 개 이상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합체자(合體字)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무겁고 가공하기 어려운 석기(石器)에서 벗어나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청동기의 기물들은 획기적인 발명이었으며, 그 기물을 주조할 때 거푸집에 새겨 넣은 금문은 당시대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자료임과 동시에 문자학의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특징을 보여 줍니다. 특히 서주(西周) 후기부터 자형의 획이 곧은 직선으로 변하면서 가늘어지는 문자로서의 발전 양상을 보이는 것을 통해 한자의 새로운 발전 양상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전의 서체에서 획일적인 변화를 보인 전서(篆書)는 인위적인 수정 작업으로 인해 탄생된 서체였기에 통일된 특징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문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문자학의 연구 성과가 이룩되기 시작한 허신의《설문해자(說文解字)》의 기본 제시 자형을 소전(小篆)으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자 연구의 오랜 전통과 보편성을 지닌 서체라 할 것입니다.
  일반적 한자 구분의 큰 구획인 고문자(古文字)의 마지막 해당 서체인 전서(篆書)를 통해 통일된 서체의 전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소전체
 

  본래 전서(篆書)는 대전(大篆)과 소전(小篆)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전서의 대표격은 소전(小篆)을 주로 말합니다. 은대(殷代)와 주대(周代)의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의 사용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주(周)나라 말기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각 지역별 문화의 특성이 독립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문자 역시 각 지역의 국가별로 개별적 특징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로 인해 모든 문화와 문물의 인위적 통일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진시황의 문자통일(文字統一)이라는 것이 바로 소전(小篆)의 서체로 획일화시킨 것입니다. 사료에 의하면 진시황이 승상(丞相)이었던 이사(李斯) 등이 이전에 흩어져 있던 복잡하고 불편한 문자들을 통일시키게 됩니다.

  특이한 점은 진나라가 통일 이전에 사용하던 주나라 선왕(宣王)때 태사(太史)인 사 주(史han-f03-1.gif)가 만들어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까지 사용하던 문자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량해서 만들게 되었는데, 통일 이전 사용하던 점과 획의 범위가 복잡한 조형미를 지녔던 문자를 대전[大篆 - 혹은 주의 태사가 만든 글이라는 의미로 주문(han-f03-1.gif文)이라고도 함]이라 하고, 통일된 새로운 문자를 소전[小篆 - 혹은 '진나라의 전서'라는 의미로 진전(秦篆)이라고도 함]이라 합니다. 하지만 진의 흥망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소전이었기에, 사용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고 곧 새로운 金文字의 서체인 예서(隸書)가 등장하게 됩니다.

  앞서 소전(小篆)의 특징이 인위적인 통일이라는 점으로 인해 서체가 거의 획일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골문과 금문이 지닌 단점 중의 하나인 동일 글자의 다양한 이체자(異體字)들로 인해 통일성이 부족한 아쉬움이 있는 것에 비해 소전은 인위적으로 통일을 시켰기 때문에 자형의 불일치를 완전하게 해소해 여불위(呂不韋)의 말대로 '一字千金(일자천금)'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소전은 자형 자체로 보더라도 이전의 갑골문이나 금문보다 상당하게 상형(象形)의 회화적 성격을 탈피하고 문자의 기호적 성격으로 전환하고 있는 특징을 보입니다.
  이와 같이 자형의 일치로 인해 하나의 완전한 글자들로 형태를 지니게 된 소전은 현재까지 문자학(文字學)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완전한 문자의 특성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가장 미흡한 점이 서체에서 획이 꺾이는 부분을 모두 둥글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소전은 아직 완전한 문자로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통일된 한자의 틀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큰 가치를 부여해 왔습니다. 바로 문자학 연구의 중심 자형으로 이어져 왔다는 점이 소전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심이 되고, 현대의 한자를 이해함에 있어 소전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바른 자원(字源)을 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소전의 자형이 가장 오래된 자형이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접하는 자전들 역시 고서체(古書體)로 소전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한자의 자원을 해설하는 학설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떤 하나의 학설만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견강부회식(牽强附會式) 해석의 함정이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자 자원의 바른 접근이 있어야 합니다. 갑골문이나 금문이 자원 연구의 중요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자형(字形)의 불일치나 글자 수의 미비로 인해 다수의 한자를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전의 가치는 한자 이해의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hexa_blu.gif 지금까지 갑골문과 금문으로부터 전서의 소전에 이르기까지 고대 문자의 서체로 규정하는 고문자(古文字)의 전형을 다루었습니다. 현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의 모양들은 표의문자(表意文字)의 특성을 지녔다고 하면서도 본래 상형(象形)의 원형이 상당히 무너진 형태입니다. 그렇기에 명확한 한자의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문자인 갑골문와 금문, 전서의 서체에 대한 확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의 예서(隸書)의 서체부터는 현대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의 모양을 그대로 사용하는 금문자(今文字)로 이어집니다.

 

 

고문자(古文字)들과는 다른 차원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한자의 자형(字形)이 성립된 예서(隸書)는 진(秦)나라의 군현제(郡縣制) 실시라는 정치적인 배경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행정적 실용성이 중시되어 보다 빠르고 쉽게 문자를 쓰기 위해 고안되었던 것입니다. 상형(象形)의 회화적 요소를 벗어버리고 문자의 기호적 요소가 완성되어 현대 한자의 출발점으로도 볼 수 있는 예서(隸書)의 전형을 살펴봅니다.

예서체
 

  예서의 명칭에 대한 이해는 예서가 형성된 배경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학설로는 법가(法家)를 바탕으로 철권통치를 행했던 진(秦)나라였기에 강한 형벌(刑罰)의 행사로 노역(勞役)의 죄수들이 많아 이 죄수들을 관리하는 형리(刑吏)들이 간편하고 쉬운 행정 문서를 다루기 위해 고안했다고 해서 '노예 예[隸]'자를 쓴 예서(隸書)라 명명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문자의 흐름은 진(秦)나라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이어 한(漢)나라 초기까지는 예서의 체제가 완성되지 않았는데, 한(漢) 무제대(武帝代)에 예서가 국가의 공식 문자로 정착되고 유학(儒學)이 국교(國敎)가 된 이후 경전(經傳)의 해석을 둘러싼 왕성한 학문적 발전과 함께 서체 역시 큰 진전을 가져오게 됩니다.

  한 무제의 앞 경제(景帝) 때 산동(山東) 지방 곡부(曲阜)의 공자(孔子)의 고택(古宅)을 개축하다가 벽 속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경전(經傳)에 대한 해석으로 훈고학(訓 學)이 발전하는데, 이 벽 속에서 발견된 경전에 기록된 문자는 한대(漢代)의 예서보다 훨씬 이전의 서체였기에 이를 고문경서(古文經書)라 하고 당시 사용되던 경서를 금문경서(今文經書)라 합니다. 서체뿐만 아니라 경전 해석 연구에도 큰 의의를 둘 수 있는데, 기원후 100년경에 완성된 허신(許愼)의《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이 고문경서의 서체를 고문(古文)이라 제시하면서 기본 소전(小篆) 자형과 함께 인용하고 있습니다. 결국《설문해자》는 당시 규격화되어 가는 서체[예서]로 인해 정확한 한자의 연원을 밝히려는 의도와 경전의 바른 해석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진나라의 소전(小篆)은 이전의 갑골문(甲骨文)이나 금문(金文)에 비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룬 한자의 개념을 제시한 서체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문자 자체로 보면 획이 둥글고 자형의 성분들을 그대로 살린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용적 방향으로 의미전달에 큰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고 빨리 쓸 수 있는 형태로 간략하게 된 것입니다.
  곡선의 둥근 자형으로 인해 아직 회화적 요소가 남아 있던 소전의 자형에서 완전히 벗어나 직선의 기호적 성격을 지닌 서체를 만들어 전체적인 자형이 사각형 모양으로 되는 전형을 이루게 됩니다. 현대의 한자에서 둥근 원형 모양의 획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예서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또 다른 획기적인 변화는 한자들마다 각기 복잡한 모양의 서체를 유사한 모양이면 공통의 모양으로 간략화 시켜 실용성을 더한 것인데, 이 부분은 후대에 한자의 자형만으로 의미를 이해하는데 다소 부적절하거나 난해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전(小篆)과 같은 고문자(古文字)의 자형이 한자의 자원을 이해하는 중요 수단이 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상형적 회화요소의 고대문자 틀을 벗고 왕성한 새로운 문자의 규격을 이루게 된 예서의 출현은 이후 한자 자형의 전형을 제시하게 됩니다. 문자의 틀이 완성되어 급속도의 서체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예서의 가치는 이후 서예(書藝)라는 개념까지 도출하게 됩니다. 실제 이후에 등장한 서체의 규범이라고 하는 해서(楷書)의 자형도 예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면 이미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에 한자 자형의 전형은 예서에서 모두 갖추어졌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은은한 고풍(古風)의 예술미(藝術美)를 느낄 수 있는 서체로 현대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서체로 전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서체의 변천사에서 해서체(楷書體)부터는 문자학적 논의보다는 예술적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정서(正書)나 진서(眞書)의 명칭으로도 불리는 해서체는 현재까지 서예(書藝)의 기본 교습 서체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문자학적 논의보다는 예술적 경지에 이른 당대의 대표적인 서예가(書藝家)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해서체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해서체 예시
 

  중국 후한(後漢)시대 말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해서(楷書)는 '楷'자가 '본보기'나 '모범'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듯이 표준으로 삼을 만한 서체라는 의미입니다. 위(魏)·진(晉), 남북조(南北朝)시대에 그 기틀이 완성된 해서(楷書)는 동진(東晋)의 유명한 왕희지(王羲之)와 함께 당(唐)나라에 들어서 구양순(歐陽詢)이나 안진경(顔眞卿)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그들 이름의 서체라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서체의 전형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해서(楷書)가 현재까지 표준 서체로서의 면모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인물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가지 해서체(楷書體)의 정착에 앞서 예서(隸書)에서 또 다른 한 축을 이룬 서체로 팔분체(八分體)를 언급합니다. 한(漢)나라 중기에 채옹(蔡邕)이라는 인물이 만들었다는 팔분체는 전서(篆書)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한 예서의 틀을 완성시킨 서체인데, 특히 장식미를 더한 양식의 서체로 후한시대에 많이 사용됨으로 해서 예서와 해서의 과도기적 단계의 서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서(隸書)에서 발전된 해서체의 가장 커다란 특징은 예서체(隸書體) 자형의 전체 윤곽이 다소 가로로 퍼진 형태라면, 해서(楷書體)는 다소 세로로 퍼진 형태를 지니고 있는 점입니다. 이는 서체가 보다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양식으로 발전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데, 역시 유명한 서예가들의 서체 전형으로 인해 정착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범적인 표준의 서체로 정착된 해서(楷書)는 현대까지 한자 교본의 전형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초서(草書)나 행서(行書)의 지나친 파격을 극복하고 점(點) 하나 획(劃) 하나라도 정확하게 독립시켜 씀으로 해서 필사에 다소 불편했던 예서(隸書)의 지위를 넘겨받은 서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楷書)는 바른 한자(漢字) 자형의 전형으로 본보기 삼을 수 있는 서체이기에 앞으로도 방정한 예술미와 함께 한자 교습의 기본 서체로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古代)에서 중세(中世)로 접어들면서 문자(文字)의 활동도는 크게 신장됩니다. 이에 이전의 예서(隸書)가 지닌 혁신성 역시 크게 감소되면서, 보다 실용적으로 신속하게 문자를 쓸 필요가 생겨났고, 이에 부흥해서 크게 유행하게 된 가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현대에도 예술적 가치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서의 이모저모를 알아봅니다.

초서체 예시
 

  초서는 아주 거칠고 단정하지 못하다는 의미인 "초솔(草率)하다"는 의미에서 극도로 흘려서 쓴 서체라는 의미로 초서(草書)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표의문자(表意文字)의 단점인 서체(書體)의 복잡함과 난해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극도로 흘려서 빠르고 간단하게 쓴 서체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규격을 갖춘 서체인 예서(隸書)로부터 해서(楷書)로 발전했지만, 글자를 쓸 때 너무 복잡하고 많은 정성이 들어가 쓰는 시간도 꾀 필요한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간략하게 흘려 쓰는 초서(草書)가 생겨난 것입니다..

  현재 초서는 문자로서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적 경지로까지 발전하여 그 멋을 자랑하고 있지만, 오히려 너무 지나치게 간략화시켜 흘려 쓰게 된 결과 해독(解讀)의 어려움을 가져와 실용성을 상실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의 규격성과 복잡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이나 일부분만으로 표현하면서 전체적으로 획을 연결해서 신속하게 쓸 수 있게 발전합니다.. 발생시기도 "한조(漢朝)가 흥하자 초서(草書)가 나왔다"는 《설문해자(說文解字)》서문(序文)을 보듯이 예서(隸書)가 한창 번성하던 한(漢)나라시대에 함께 등장했는데, 초기의 장초(章草)에서 동진(東晋)시대의 금초(今草)와 당(唐)나라 때의 광초(狂草)까지 다양하게 발전을 하지만 실용성은 떨어지게 됩니다.

장초(章草) : 초기의 초서체로 진말한초(秦末漢初)에 예서체(隸書體)를 간략하게 흘려 쓰기 시작하면서 발생되었는데, 장제(章帝)가 즐겨 써서 장초(章草)라고 합니다..

금초(今草) : 후한(後漢)에서 동진(東晋)시대에 장초(章草)에서 발전해 독자적인 서체의 틀을 완성해 현재까지 일반적인 초서(草書)의 틀을 의미하게 됩니다..

광초(狂草) : 마치 미친 듯이 거의 끊어짐 없이 글자들까지 이어서 쓰는 형식의 광초(狂草)는 당(唐)나라 때 벌써 예술적 경지로 발전합니다..

  몇십 번의 필획으로 사각형 네모꼴의 규격에 맞춰 정성을 들여야 하는 기존의 예서체(隸書體)나 해서체(楷書體)의 어려움을 극복한 초서(草書)는 효율적이고 신속한 필기 형태로 인해 다양하게 발전합니다. 그러나 그 취지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지나치게 간략화 해 현대까지 예술적 대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지만, 실용적 가치를 다소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결국 일반인들의 속성(速成) 필기체의 주축을 행서체(行書體)로 옮겨가게 합니다.

 

  몇 천년간의 한자(漢字)의 역사를 볼 때 다양한 문자(文字) 형태를 가지고 발전되어 왔지만, 역시 문자가 지닌 기본적인 특징인 효율적 사용을 위해서는 단순한 자형(字形)과 편리한 필기(筆記)의 가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단순성과 편리성을 함께 지닌 특성을 가지고 일반인이 주로 사용하는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입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글자들의 모양에서 다양성과 변화의 아름다움까지 느끼게 만든 행서를 알아봅니다..

행서체 예시
 

  규격체로 인해 비능률적인 해서(楷書)의 단점과 지나친 간략화로 난해한 초서(草書)의 단점을 함께 보완하고자 생겨난 서체가 행서(行書)입니다..

  발생시기에 대해서 흔히 행서(行書)가 해서(楷書)와 초서(草書)의 중간형태를 띠고 있고, 일반적으로 초서(草書)가 서체의 종류 가운데 가장 흘려 쓴 형태이기 때문에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곧 규격체에서 흘림체로 변천하는 과정으로 볼 때 초서가 가장 마지막 단계의 서체(書體)로 보여, 발생시기도 초서가 가장 후대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후대의 서체는 행서(行書)입니다..

  후한(後漢) 말기부터 시작되어 진(晋)의 왕희지(王羲之)가 등장하면서 확고한 틀이 완성된 행서(行書)는 해서(楷書)의 필기체(筆記體) 형태를 띠고 있어 초서(草書)처럼 획을 연결해 쓰면서도 지나친 간략화를 하지 않아 쓰기 쉽고 보기 좋은 두 가지 양상을 모두 해결했습니다. 특히 서예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는 왕희지의《난정서(蘭亭序)》는 행서의 특징인 표현의 다양성과 형태의 변화감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행서의 기본적인 특징은 해서와의 차이점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해서(楷書)가 쓰는 방식이 획을 정성들여 헛된 부분이 나타나지 않게 쓰는 감추는 방식인 '장봉(藏鋒)의 필체'인 반면에 행서(行書)는 자연스럽게 필기하는 방식이어서 획의 연결선 등을 드러내는 방식인 '노봉(露鋒)의 필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서체(書體)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서체의 변화 방향은 자형(字形)의 복잡함에서 간단함으로, 또 필기(筆記)와 이해의 난해함에서 편리함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형의 간단함과 필기 이해의 편리함을 모두 어느 정도 소화해 낸 서체가 바로 행서(行書)입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서체들 가운데 예서(隸書)나 초서(草書)는 주로 예술적 가치로 사용되고, 해서(楷書)는 활자체의 대표 격으로 쓰이는데 비해서 행서(行書)는 보통 사람들의 친근한 필기체로 보다 서민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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